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리아 테레지아 (문단 편집) === [[7년 전쟁]] === 즉위 초와 달리 통치 경험이 원숙해진 데다 제국에 대한 통제력이 공고해졌기에 왕위 계승 전쟁 때 잃어버린 슐레지엔을 되찾기 위해 전쟁을 주도하게 되었다. 십여 년간 내정 개혁과 군제 개혁을 실시하면서 [[벤첼 안톤 폰 카우니츠]][* 시동생 카를의 수하로 벨기에를 잘 다스린 공적으로 재상으로 등용되었으며 마리아 테레지아 사후 1793년까지 오스트리아의 재상을 역임했다. 오스트리아 역사상 유이한 국가재상(슈타츠칸츨러, Staatskanzler)으로 다른 한 명은 카우니츠의 손녀사위이자 [[빈 회의]]를 주도한 [[메테르니히]]이다.]를 등용해 프랑스에게 접근했고, 당시 프랑스 궁정의 실세였던 [[퐁파두르 부인]]과 함께 [[동맹의 역전]]을 유도했다. 또한 개인적으로 프로이센을 싫어했으며 [[프리드리히 대왕|프리드리히 2세]]를 증오했던 [[러시아 제국|러시아]]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옐리자베타 여제]]와 협력해 프로이센 공격을 감행했다. 초반에는 그 동안 힘을 쌓은 보람도 없이 또 프로이센 군대에 털리면서 [[프라하]]까지 밀렸지만 프로이센은 사방이 적이었고[* 러시아, 프랑스를 제외하고도 작센, [[스웨덴]]도 동맹을 맺었다. 바이에른은 중립, 스페인은 부르봉 왕조가 왕위에 등극한 지 2~ 3세대이던 시절이라 프랑스 2중대였다.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 승리해 그들의 지원을 받아 왕위에 등극한 [[작센 선제후국|작센]] [[선제후]] [[아우구스트 3세]] 시절이었는데, 왕위에 오른 과정이 과정인데다가 작센 선제후가 곧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이었으니 당연히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측에 붙었고 직접적인 군사행동은 안 했지만 통행로와 주둔지 제공 등으로 러시아군을 도왔다. 당대 유럽 국가 대부분이 적이었다. 사방이 적이라는 것도 비유가 아니라 진짜 물리적으로도 서쪽으로 프랑스와 스페인, 남쪽으로 작센과 오스트리아, 북쪽 스웨덴, 동쪽 러시아로 완전히 둘러싸여 있었다.] 너무 깊숙이 쳐들어오다가 [[콜린 전투]]에서 패배하여 철수하면서 위기를 넘긴다.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참전하면서 프로이센을 공세로 몰아넣기도 했지만 러시아군은 이길만 하면 보급상 문제로 후퇴하고 프리드리히 2세도 만만찮은 상대이기에 결정적인 승기는 잡지 못 했다. 영국의 정권 교체로 프로이센에 대한 재정 지원이 끊기고 프로이센이 약화되면서 승기를 잡았고 프리드리히 2세가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오스트리아의 우세가 이어졌으나 프로이센이 남은 병력으로 끈질기게 버티고 동맹의 한 축이었던 러시아의 옐리자베타 여제가 사망하면서 분위기가 뒤집혔다. 하필 옐리자베타 여제의 뒤를 이은 인물이 [[덴마크]] [[올덴부르크 왕조|올렌보르 왕조]]의 방계인 [[홀슈타인고토르프 왕조|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 출신이자 프리드리히 2세를 지지하는 [[표트르 3세]]였던 것.[* 어처구니 없게도 표트르 3세 정도는 아니지만 마리아 테레지아의 장남이며 후계자 [[요제프 2세]]까지도 적국의 원수인 프리드리히 2세 빠가 되면서 뒷목을 잡게 만들었다. 독일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프리드리히를 지지하는 정도를 넘어서 아예 숭배 분위기가 퍼져있었다. 심지어 프리드리히 2세가 단 한 번도 가본 적도 없는 영국에서도 인기가 엄청나게 높았으며, 심지어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프리드리히 지지자가 많았다. 훗날의 나폴레옹도 프리드리히의 지지자였는데, 나폴레옹 이전에 유럽의 젊은이들에게 프리드리히 2세는 그냥 팬이 많은 정도가 아니라 숭배 수준이었다.] 그 결과 러시아는 전쟁에서 빠지고 홀로 남은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에 털려서 [[브라티슬라바|프레스부르크]] 조약으로 슐레지엔은 프로이센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오스트리아는 빚더미에 올라앉았는데, 이전 재정 수입의 22%를 차지하는 슐레지엔을 되찾기 위해 7년 전쟁의 순수 전쟁 비용만 11년치 재정 수입인 2억 6,000만 굴덴을 쏟아부었고, 전후 여파로 전쟁이 끝난 첫 해인 1763년에는 세입(2,300만 굴덴)보다 세출이 3배(7,000만 굴덴)나 될 정도로 국력이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프란츠 1세 항목에 전쟁 중 왕실은 돈을 꽤 벌었다고 하는데,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왕실 예산은 3% 내외(사치가 심한 프랑스는 5%)였기 때문에 국가 예산과 비교가 안 된다. 당시 가장 큰 지출인 상비군 수십만 명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만 해도 엄청난 돈이 들고, 현대에도 돈 잡아먹는 귀신인 화기, 군함, 대포 등은 당시 경제활동 상황을 고려해보면 국가에 큰 부담이었다. 적국 프로이센도 전쟁으로 국토가 잿더미에 빚이 쌓였으므로 당분간 서로 충돌할 일은 없었다. 그렇지만 남편이 벌어놓은 재산 덕에 국채 발행에 성공했다고 하니 왕실 재산 규모가 어마어마한 규모였던 건 사실로 보인다.] 이 때문에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합스부르크 제국 전역에서 개혁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